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바 미사일 위기 (문단 편집) === [[치킨 게임]] === >우리는 전쟁 직전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군사적 긴장 상태를 창출했고, 그런 후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미치광이 전략|미친]] [[니키타 흐루쇼프|니키타]]가 우리들을 엄청난 혼란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 >---- >페트로 셸레스트(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겸 [[키이우|키예프]] 시장), 1962년 11월. 22일의 케네디의 비난 성명에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쿠바에 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소련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거래를 할 것이라고 여겼고 10월 21일까지 소련 지도부는 이 환상을 공유했다. 하지만 10월 21일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소련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나설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소련 지도부는 당황하였다. 흐루쇼프는 '비극적'인 상황이 되었다고 하였다. 소련 군부는 미국이 핵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흐루쇼프는 핵 없이는 쿠바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소련 군부는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전술핵무기 차원의 반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전술핵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핵전쟁의 가능성에 직면하자 동요한 흐루쇼프는 플리예프 장군에게 '''어떠한 핵무기도''' 사용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로디온 말리놉스키]]의 주장으로 [[소련 해군]]은 [[어뢰#s-3.6.3|핵어뢰]]를 장착한 4척의 [[폭스트로트급 잠수함]]을 쿠바 해안에 접근시키기로 하였다. 소련 군부 강경파는 케네디가 선거를 앞두고 꾀를 부리는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흐루쇼프는 이 상황이 자칫 열핵전쟁으로 번질 것이라고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나디르 계획의 주 목적이 미국의 쿠바 침공을 억제하는 것이라며 소련 군부 매파들을 설득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리놉스키 국방장관은 미국이 카리브 해에 배치한 해군력이 아직 형편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쿠바에 대한 미사일 전력 배치를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흐루쇼프는 세 가지 방안을 내걸고 토의했다. 1. 라디오를 통해 공식적으로 핵우산을 쿠바로 확대한다는 안을 발표하는 것. 1. 미군이 쿠바를 침공할 경우 즉각 소련군 핵무기 통제권을 쿠바군으로 넘기고 쿠바가 자국의 방어를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 1. 쿠바 주둔 소련군이 방어용으로 단거리 핵지대지 미사일만 운용하고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운용하지 않는 것. 그러나 당시 소련 수뇌부의 회의는 미국이 소련 수뇌부의 예상을 깨고 비난 성명을 한 이후에 나온 것이어서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소련 군부 매파들은 흐루쇼프가 결정을 미루고 강경한 대응을 하기를 주문했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군에 '''[[데프콘]] 3'''를 발령했다. 아울러 미 해군이 별다른 전력을 동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련 군부 매파의 예상을 깨고 [[미합중국 해군]]은 [[항공모함]] '''8척'''을 포함, 무려 '''90척'''의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쿠바의 모든 영해를 봉쇄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카리브 해]]로 미사일기지 건설 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대한 강제 수색 명령을 내리고[* 만약 전략 물자가 발견된다면 압수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거부할 시 '''격침'''시키라는 초강수를 뒀다. 또 [[미합중국 공군]]은 플로리다 공군기지에 140대였던 전투기를 511대로 늘리는 동시에 40기의 [[공중급유기]]를 파견해서 전력을 증강시켰으며 중앙 방공 사령부는 520여기의 추가 항공기를 언제든지 출격시키게끔 하기도 했다.[* '''[[항공모함]] [[해군 항공대]]에 편제된 함재기는 빠진 숫자다.'''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항공기였다는 것.][[https://www.afhistory.af.mil/FAQs/Fact-Sheets/Article/458954/1962-cuban-missile-crisis/|#]]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 봉쇄를 "공해상 항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제법 위반이자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게 '''미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핵잠수함 6척[* 여기서 '핵잠수함'이란 소련이 이제 막 실전배치한 핵추진 방식 [[노벰버급 잠수함]]이 아닌 '''핵어뢰'''를 탑재한 디젤 잠수함들이었다.]의 호위 하에 쿠바로 강행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미 해군은 [[P-3 오라이언]] [[대잠초계기]]와 [[순양함]]을 급파했고 동시에 즉시 보유한 모든 핵전력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해 주요 전략폭격기에 핵탄두 탑재 준비를 마쳤으며 탄도미사일들은 발사 준비 절차에 돌입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NATO]]에 서로 비상이 걸리고 [[동독]]과 [[서독]]은 물론이며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맞닿는 모든 곳에서 위험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상황이었다. '''모든 인류가 두려워했던 [[제3차 세계 대전]]이 바로 눈 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초강경한 입장은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라고 명령했다.[* 그렇다고 절대 소련에 굴할 심산은 아니었다. 시간을 계속 벌었던 것일 뿐.] 명령에 불응하거나 무기가 발견된 선박은 격침보다 나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도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이 봉쇄를 뚫고 지나간 선박들도 많았고 흐루쇼프가 되돌린 선박들도 상당수 있었다. 미 해군과 마주치기 직전 방향을 돌린 선박들 중 상당수가 미사일을 탑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무력 충돌은 피하고 싶었거니와 자국의 최신 무기 체제인 핵미사일을 적의 수중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 당시 소련 선박들은 잠수함의 근접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실제 격침은 고사하고 소련 선박에 사격이라도 했다간 바로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만한 상황이었다. 이후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대서양에서 자칫하면 무력 충돌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대규모 핵잠수함 추적을 벌인 앤더슨 [[제독]]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위기 종결 이후 앤더슨 제독은 2차대전 이후 미 해군의 대잠 능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최적의 기회였다고 진술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 역시 봉쇄 및 검역에 대해 매우 조심스런 조치를 취했다. 전 세계와 미국 내부적으로는 쿠바는 확실하게 '''격리'''되고 있다는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했고 소련에게는 핵과 미사일을 실은 배를 어서 회항시키라는 압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미 해군은 핵/미사일이 실려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소련측 화물선 1척을 먼저 골라서 검역을 결정했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봉쇄에 나선 개별 선박들에게 '''소련 측 인원들에게 우호를 사기 위한 가벼운 선물 구매'''를 지시했고 이를 위해 각 해군 함정들은 라이터와 담배, 사탕과 초콜릿 등의 선물류를 급히 사들여야 했다. 검역에 나서는 해군 병력들은 어두칙칙한 갈색이나 청색 근무복이 아닌, 멋드러지고 적의를 표시하지 않는 해군 정복을 입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정복은 전투 시에는 입지 않는다. 즉, 정복을 입음으로써 소련 측에게 우리는 교전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검역에 나서는 함선들은 소련 측 선박과 인원에게 화기를 겨누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이런 조심스런 행동 끝에 미국은 화물선 1척을 검역한 후 통과시켜주었고 이는 미국이 의도한 대로 전 세계에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한편 24일 전략공군사령부의 토머스 S. 파워(Thomas S. Power)[* 당시 르메이는 [[공군참모총장]]이었고 파워 장군은 르메이의 후임 전략공군사령관이었다. 이 양반은 르메이에 대해 농반진반으로 ''''형용사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친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르메이식 일방적 강경론에는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마저도 이 사태 때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한 것.] 공군대장은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아래 '''데프콘 2를 발령'''했다. 준전시태세가 선포된 것이다. 이에 따라 1,400대가 넘는 전략폭격기와 134기의 ICBM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전시 작계에 따라 공군 기지에 배치된 전략폭격기 부대가 핵 공격에 대비해 미 본토 각지의 민간 공항에 분산전개하기 시작했으며, B-52가 하루 평균 75소티 출격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나머지 미군은 데프콘 3을 유지했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americanrhetoric.com/adlaistevensoncubanmisslecrisispublicdomain.jpg|width=100%]]}}}|| 10월 25일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 대사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 탄도미사일의 정찰 사진을 공개하면서 소련 측 대사 발레리안 알렉산드로비치 조린(Valerian Alexandrovich Zorin)에게 "귀하는 쿠바에 귀국의 탄도미사일이 배치 중임을 인정합니까? [[통역]] 기다릴 것 없이, 예/아니오로 대답하십시오(Yes or no? Don't wait for the translation: yes or no?)"라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에 조린은 "여기는 미국 법정이 아닙니다. [[검사(법조인)|검사]]가 [[범죄자]]를 취조하는 듯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I am not in an American court of law, and therefore do not answer a question put to me in the manner of a prosecuting counsel…you will have your answer in due course)"라고 응수했다. 이에 스티븐슨도 지지 않고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귀하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I am prepared to wait for my answer until Hell freezes over)"라고 다시 맞섰다. 안보리가 산회하고 몇 시간 후 날을 넘겨 10월 26일 오전 1시 3분 미네소타 주 덜루스 공항의 방공관제소에서 철조망 월담을 시도하는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오대호 일대를 관할하는 이 방공관제소는 북극권과 캐나다를 통해 접근하는 소련군 폭격기들을 감지해야 할 곳으로 잔뜩 긴장했던 기지경비대는 즉시 적, 소련군 특수부대 [[스페츠나츠]]의 사전침투 시도로 파악하고 대침투 실제상황을 발동했다. 즉시 미국 각지의 기지들에서 전투기들이 황급히 산개 및 핵 공대공 미사일을 탑재한 후 이륙 준비를 시작했다. 이들 전투기들의 이륙은 몇 분 후 중단되었다. 관제소 경비대원들이 확인한 월담 시도자는 스페츠나츠가 아니라 '''[[불곰|곰]]'''이었다. 한편 흐루쇼프도 전략 핵미사일이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교착 상황에서 10월 27일, 흐루쇼프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튀르키예에서 '유사한 무기'를 제거한다면 자신들도 쿠바에서 무기를 제거하겠다고 제안했으며 미국과 소련이 UN 안보리에 [[튀르키예]]와 쿠바 양국의 국경과 주권의 보전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할 것을 제안했다. 이런 흐루쇼프의 제안에 소련 외무기관들은 물론 소련 시민들도 안도했다. 빅토르 이스라옐란을 비롯한 고위 외무 관리들도 이를 상호 수용 가능한 타협 조건으로 환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